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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100번째 결혼식

2011-01-03


여기, 마흔 세 번의 결혼식을 치른 여자가 있다. 마흔 세 번도 모자라 앞으로 또 한 번의 결혼식을 앞두고 있는. 오해하지 마시라. 숱한 이 ‘결혼의 추억’들은 그녀 혼자만의 것이 아니니. ‘대지를 위한 바느질’의 대표이자 디자이너인 이경재는 웨딩드레스를 만든다. 그냥 웨딩드레스가 아니다. 옥수수 전분과 한지, 쐐기풀 등의 친환경 소재를 사용한 말 그대로의 ‘친환경 웨딩드레스’이다. 몇 번의 결혼식을 치르고 난 이후엔 아예 웨딩 컨설팅 사업에도 뛰어들었다. 순전히 ‘타의’의 결과이다. 참으로 재미있는 사업확장 방식이 아닐 수 없다. 친환경 웨딩드레스와 청첩장, 뿌리가 살아있는 부케, 리폼한 예물반지, 유기농 케이터링에 이르기까지 그녀가 디자인하는 결혼식은 생명과 환경에 대한 존중으로 가득하다.

에디터 | 이은정(ejlee@jungle.co.kr)
사진제공 │ 대지를 위한 바느질

하나, 그린디자인

원래 전공이 패션디자인이었어요.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2년 정도 하다가 어떤 계기로 인해 강원도로 귀농을 했지요. 농사 짓는 흉내도 내고 마을 건물을 펜션으로 바꿔서 운영하던 와중에 서서히 환경 쪽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딱히 ‘환경을 공부해야겠다’고 시작한 건 아니었어요. 강원도에 있을 때 EBS를 보다가 우연히 윤호섭 교수님이 나오시는 방송을 봤어요. 그때는 그냥 아, 저런 분이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죠. 그러다가 공부를 더 해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 와중에서 떠오른 분이 윤호섭 교수님이었어요. 찾아가서 교수님 밑에서 공부하고 싶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그냥 오지 말라시는 거에요. 이미 자연 속에서 친환경적인 삶을 살고 있는데 더 이상 배울 것이 뭐가 있겠냐며 그냥 열심히 살라고 하셨죠. 그러니까 더 가고 싶더라고요(웃음).

공부를 시작하고 막연하게만 생각하던 환경문제를 자세히 접하게 되면서 생각보다 굉장히 심각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그린 디자인 대학원에서 디자인을 가르치는 것은 아니에요. 거의 무슨 철학과 같죠. 책 보고 토론 하고… 분야도 다양해요. 저는 패션디자인이지만 그래픽 전공, 영문학, 건축 전공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모두 자신의 분야를 기초로 공부하죠. 사실 그린디자인이라는 학문은 자기만의 철학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인 것 같아요. 저는 전공이 옷이니까 그 곳에서 배운 철학을 옷으로 풀었던 것뿐이죠.

둘, 웨딩드레스

그린디자인에 대한 공부를 시작하고 난 후 첫 학기부터 시험 문제는 늘 디자이너의 역할과 책임을 묻는 것이었어요. 공부를 하면서 생각이 조금씩 바뀌는 것을 느꼈죠. 졸업시험도 같은 내용이었어요. 옥수수 전분으로 만든 비닐을 교수님을 통해 알게 되었고 그걸 이용해서 처음에는 생분해 우비를 만들었지요. 우비는 디자인적 요소를 많이 넣기엔 좀 힘들잖아요? 그러다가 2005년에 어떤 유명 연예인이 결혼하는 걸 보게 되었어요. 최고의 디자이너가 만든 드레스를 입고 결혼했는데 결혼식 후 온갖 매체에서 일주일 내내 그 얘기만 나오더라고요. 결혼식 자체의 의미 보다는 돈이나 명성이 우선되는 분위기가 좀 안타까웠어요.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웨딩드레스 시장을 조사하게 되었죠.

맞춤 고가의 소재는 실크이지만 대여해서 입는 것은 폴리에스테르로 만들어져요. 비닐이랑 똑같죠. 썩지도 않고. 조사를 하면서 교수님께 ‘의미도 있고 환경에도 좋은 드레스를 만드는 것은 어떨까요?’라고 물어봤더니 대뜸 어서 만들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렇게 첫 작품을 만들었어요. 사실 드레스를 만들면서도 회사를 차리거나 거창하게 뭘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에요. 이후에 교수님 권유로 반 년 정도를 휴학하면서 개인전을 준비하게 되었죠. 총 14벌을 만들어서 개인전을 했고 의외로 반응이 좋았어요. 전시를 진행하는 한 달 동안에 실제 결혼하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드레스를 입어줄 사람도 찾았죠. 드레스 비용은 환경을 위해 기부했고요.

많은 분들이 친환경 소재로 만든 웨딩드레스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으세요. ‘화려하지 않을 것 같다’, ‘내구성이 떨어질 것 같다’가 바로 그 내용인데요 정말 많이 오해하시는 거에요. 하나의 원단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세탁성과 내구성 등의 다양한 조사가 필수입니다. 그 모든 과정을 거쳐야만 원단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거든요. 더불어 저희는 원하시는 모든 디자인이 가능합니다. 저희가 만드는 드레스가 전량 맞춤제작이기 때문에 보여드릴 수 있는 포트폴리오가 많지 않다는 게 좀 안타까워요.

셋, 나아가 친환경 결혼식

전시 이후에 연락이 왔어요. 친환경 웨딩드레스를 입고 싶다고요. 신기해하면서 다시 만들어드렸어요. 이후에 잊을만하면 연락이 왔죠. 몇 쌍의 결혼식을 진행하다 보니 또 다른 친환경적인 요소는 없느냔 요청이 들어왔어요. 생각해보니 드레스만 바꾼다고 친환경 결혼식이 되진 않더라고요. 결혼식 시장을 한 번 조사해봤는데 결혼식으로 인한 환경오염이 엄청나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한 사람이 1년간 발생시키는 이산화탄소의 양이 12톤인데 비해 한 번 결혼식을 치르는 데 발생되는 이산화탄소는 평균 14. 5톤이에요. 1년 평균 34만 건의 결혼식이 있다는 걸 감안하면 정말 엄청난 양이 되겠죠. 더불어 피로연 음식과 한 번 쓰고 버려지는 용도의 청첩장도 무시할 수 없어요. 과열화된 웨딩 시장도 문제에요. 그야말로 거품 결혼식이죠. 이렇게 결혼식으로 야기되는 환경오염과 자원낭비를 조금이라도 막아보자는 의도에서 시작한 게 친환경 결혼식이에요. 결혼하신 분들의 만족도가 상당히 높으세요. 그 분들은 이제 친환경 아기 옷을 찾으시고요(웃음).

넷, 디자이너의 책임

환경과 윤리에 대한 디자이너의 책임과 역할에 대한 질문들을 많이 받습니다. 하지만 제가 볼 때 이 질문은 단지 디자이너에만 국한된 건 아닌 것 같아요. 모든 직업에서 다 제기되어야 하는 질문이죠. 돈이 있어야 환경도 보호하는 것이 아니냐고 이야기들을 해요. 하지만 우리가 서 있는 곳 자체가 다 환경인 겁니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망가지면 돈 버는 것이고 뭐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데 이 점을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 같아요. 과거에 우리가 아무런 책임의식 없이 진행해왔던 디자인들이 쌓이고 쌓여서 수많은 오염물질로 변했어요. 그 결과가 우리에게 돌아오는 거죠.

이번에 아기들을 위한 티셔츠를 만들면서 멸종위기 동물들을 조사했어요. 티셔츠 디자인을 세 가지 라인으로 구성했죠. 하나는 멸종된 동물들, 또 하나는 위기종, 마지막은 띠 별 동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멸종된 동물은 우리 아이들이 다시 볼 수 없잖아요. 단지 책에서만 볼 수 있을 뿐이죠. 우리 다음 세대가 지금의 위기종을 책에서만 볼지 아님 그냥 볼 수 있을지에 대한 책임은 우리에게 있어요. 지금 나의 친환경적인 실천 하나가 당장 큰 결과로 돌아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안돼요. 미래의 아이들에 대한 책임의식을 생각한다면 스케치에 대한 자세가 달라질 것이라고 봐요.

사실 그린디자인이라는 것은 실체가 없어요. 재생지나 재활용 재료를 쓴다고 모두 그린디자인은 아니잖아요. 어느 곳에서도 이런 철학들은 가르치지 않아요. 왜 아이들에게 같이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안 해주는 걸까요?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건 이기는 방법밖에 없어요. 환경이 오염돼도 돈 많이 벌어서 전용기 타고 깨끗한 곳에 가면 된다고 하죠. 나쁜 일 하고 싶은 사람은 없잖아요? 친환경도 접할 기회가 없었을 뿐이죠. 제가 트위터나 블로그를 하다 보면 디자이너들에게 연락이 많이 와요. ‘좋은 일 하시네요, 나는 그렇게 못하지만’ 이라고. 전 그 사람도 의지만 있다면 충분히 바뀔 수 있다고 봅니다. 중요한 건 작은 실천이죠.

다섯, 100번째 결혼식

예전에 어떤 신문 기자 분 하고 인터뷰를 한 적이 있어요. 인터뷰가 끝나고 그 기자님이 ‘정작 대표님은 언제 결혼하실 거에요?’라고 물으시더라고요. 그냥 웃으면서 ‘한 100 쌍 정도 결혼시키면요?’라고 답했어요. 그랬더니 그게 기사 제목으로 난 거에요(웃음). 이젠 그것 때문에 중간에 끊고 제가 결혼하고 싶어도 못하게 생겼어요. 민망해서. 그래도… 한 100 쌍 결혼시키면, 제 차례도 돌아오겠죠(웃음)?

대지를 위한 바느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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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정
잡지디자이너 과심은 여러분야에 관심은 많으나 노력은 부족함 디자인계에 정보를 알고싶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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