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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의 영혼, 제주와 만나다

2009-07-28


중문 관광단지 내에 제주의 새로운 랜드마크가 될 건축물이 지어지고 있다. 에스파냐어로 ‘물의 집’이라는 뜻의 카사 델 아구아(Casa Del Agua)는 제주국제컨벤션센터의 앵커 호텔(Anchor Hotel)이자 레저와 휴양, 다양한 문화 예술을 누릴 수 있는 최고급 리조트를 표방한다. 그리고 내년 5월 완공에 앞서 지난 3월, 카사 델 아구아의 건축가와 멕시코에서 파견된 전문가들이 1년 여 기간 동안 43억 원의 공사비를 들여 지은 ‘더 갤러리 카사 델 아구아, 제주’가 먼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여느 모델 하우스와는 사뭇 격이 다른 이곳은, 흥미로운 전시 행사가 열리는 갤러리 기능을 담당하며 멕시코가 낳은 세계적인 건축가 리카르도 레고레타만의 독보적인 건축 기법을 확인할 수 있다는데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에디터 | 이상현(shlee@jungle.co.kr), 사진 | 스튜디오 salt, 자료제공 | 수류산방


제주 바다에 따뜻하게 눕다

자유로운 라틴의 영혼, 리카르도 레고레타(Ricardo Legorreta). 화가 디에고 리베라와 프리다 칼로, 건축가 루이스 바라간 등 우리에게 잘 알려진 멕시코 예술가들의 전통을 이으며 거장의 반열에 오른 세계적 건축가다. 자연에 대한 경의와 깊은 묵상을 통해 철학적 건축 언어를 길어 올리는 그는, 빛과 바람, 물과 흙 등의 외부 환경을 건물 내부로 절묘하게 이끌어내는 기법으로 가장 유명하다. 나무와 흙에서 영감을 얻은 색으로 건물 벽을 채색하고, 물은 어미의 양수처럼 공간을 흐르거나 감싸며, 열린 천창으로부터 빛이 태양처럼 정수리로 낙하하는 곳…. 레고레타에게 있어서 자연은 지붕과 벽과 같이 공간을 완성하는 또 하나의 건축 요소다.

동아시아에서는 최초로 일반에 공개되는 그의 작품 ‘카사 델 아구아’ 역시, 먼저 아름다운 섬 제주에서 영감과 모티브를 얻으며 시작됐다(일례로 레고레타가 제주에 도착하자마자 찾은 곳이 ‘돌 박물관’이었다고 한다). 탐라도의 돌과 흙, 물과 바람 등 자연 환경과 당산목과 본향당 등 토착 문화를 유심히 관찰하면서 리카르도 레고레타는 물의 집 ‘카사 델 아구아’의 윤곽을 잡아갔다. 구멍이 숭숭 뚫린 제주 화산석을 건축 자재로 활용하는 등 구체적인 대입은 물론이고, 계단 형태로 되어 있는 녹차 밭과 오름에서 착안해 경사를 따라 마치 바다를 향해 열려 있는 거대한 조각품 같은 매스를 구상하는 등 포괄적인 영향을 받았다. 이는 자연과 예술에 내재한 근본적인 요소에서, 시대와 유행을 벗어난 본질적인 아름다움을 끌어내는 레고레타의 건축 기법이 미국과 중동, 유럽, 일본 등에 이어 제주에서도 이어지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빛의 연금술사, 레고레타

특히 빛의 연금술사처럼 레고레타가 빚어내는 태양광의 운용은, 자연에 내재한 본질적인 아름다움이 그의 건축 공간에 또렷이 이식되는 대표적인 예다. 건물의 열린 틈으로 스며드는 빛이 태양의 위치와 구름의 정도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반응하며 만들어내는 다채로운 표정은, ‘한편의 시’라고 비유되는 레고레타의 고유한 건축적 시그니처다. ‘더 갤러리 카사 델 아구아, 제주’에서도 회랑과 복도, 테라스 등에 마치 가위로 오려낸 종이처럼 빛과 그림자가 ‘재단’되어 드리워지는 광경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특히 높은 격자 구조의 천장을 거치는 빛은 건물 내 외부에 무늬를 만들며 예기치 않은 아름다움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이 한 조각 빛으로 말미암은 자연의 질서와 우주의 섭리에 대한 우리의 깨우침은, “공간은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지만 그 공간이 사람들의 정신을 불러 세우지 못한다면 이는 건축이라 할 수 없다”고 말했던 거장의 사려 깊은 고민과 배려로 이뤄지는 것일 테다.


물론 이 광경은 고양이처럼 나른하게 앉아서 태양의 운행을 목도한 자만이 발견할 수 있는 변화이며, 깨달음 역시 공간과 정서적인 교감을 일으킨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경험이기도 하다. 즉 레고레타의 건축물은 외부 환경을 내부로 끌어들이는 동시에, 공간에 머무는 인간의 시선을 바깥 자연으로 향하도록 조율하고 있는 건 아닐까. ‘더 갤러리 카사 델 아구아, 제주’의 마치 액자처럼 하얀 외벽에 뚫려 있는 네모난 창은 인간의 시선이 닿았을 때 그림처럼 풍경을 담아낼 수 있고, 고요하게 물이 흐르는 수 공간도 멀리 제주 앞바다와 시야가 이어졌을 때에야 비로소 파도처럼 넘실거릴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프로젝트 초기부터 참여해 레고레타와 소통해 온 오영근 교수(호서대 실내디자인학과, 한국실내디자인학회 회장)는 “일반적인 건축 요소가 물리적인 데 반해 레고레타의 건축에는 ‘감성’이 있다. 그것은 문화에 뿌리를 둔 것이며, 공간을 통해 실제로 경험하는 하나의 시이다. …그의 건축은 공간에 빛을 끌어들이는 요소를 더하고 장식을 최소화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사유와 함께 감성의 울림을 불러일으킨다”고 말한다.


두 번째 집을 찾아서

이렇듯 자연을 통한 사유와 감성을 고요하게 담아내는 카사 델 아구아는, 도시인의 ‘두 번째 집’을 지향하고 있다. 이것은 역사 속 수많은 예술가들과 명사들이 예술의 영감과 삶의 성찰을 얻고자 대자연 속에 마련했던 ‘또 하나의 집’과 닮아 있으며, 오늘날에도 선진국에서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이른바 ‘세컨드 하우스’ 개념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니까 숱한 관광객 사이에 섞어 잠시 머물다 떠나는 호화 휴양지가 아니라, 카사 델 아구아는 도심에 지친 영혼이 머무는 소박한 곳, 인간의 ‘마음’을 기대일 곳을 기대하며 주상절리 바닷가 위에 세워질 것이다. 1952년 모더니즘의 거장 르 코르뷔지에가 도시의 명성을 뒤로하고 남프랑스에 아내를 위한 지었던 집, 바닷가 마지막 집의 모습이 이처럼 따뜻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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