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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바랜 시간의 감성으로 맑은 공간을 엮어간다.

2004-12-28


건축가이신 아버지 덕에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디자인을 접하게 되었다는 디자이너 최영옥. 그 살아온 환경 때문인지, 섬유공예와 복식을 전공하였던 그녀였지만 어느새 건축을 자신의 천직으로 여기는 디자이너가 되어 있었다. 일본과 미국에서 인테리어디자인 데코레이션과 컬러&자재 디자인의 탄탄한 실무경험을 쌓고, 이제 국내에서 그녀의 끼를 유감없이 발산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그녀가 만들어놓는 색다른 디자인세계의 보따리를 조심스레 열어 보이고 있다.

새로움에 대한 갈증은 창의적인 공간을 엮어가는 튼실한 매개체가 되곤 한다. 디자이너의 색다른 디자인 감각이 한 설치작가의 예사롭지 않은 감수성과 만났을 때 빚어지는 다채로운 디자인색감. 그 충돌로 인해 야기되는 낯선 공간언어들은 그들 내면에 꿈틀대던 끼의 발현으로 옮겨져 자못 신선한 향기마저 불러일으킨다.

디자이너 최영옥과 설치미술가 김희경. 이 둘의 만남은 옥수동주택의 낯선 흔적 속에서 서로 교묘히 오버랩 되고 있다. 지은 지 14년가량 된 낡은 아파트, 디자이너의 손맛은 작가의 순수한 본성을 차분하게 이끌어 내고 있다. 굳이 인위적이지도 않고 무조건 채우려하지도 않는다.
언뜻 보기에 발가벗은 맨콘크리트의 회색빛 속살을 그대로 드러낸 40여 평가량의 주거공간의 모습은 작가 본연의 작품세계를 보는 듯 실감나게 다가온다.
디자이너가 풀어내는 공간의 빛바랜 듯한 흔적 만들기는 주거공간의 일상성과 충돌하며 그곳에 사는 작가의 삶을 넉넉히 담고 있는 셈이다.

말쑥하게 차려입은 모던함과 깔끔하게 정돈된 미니멀공간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버린 우리네 인테리어환경.
디자이너는 이러한 디자인만이 인테리어를 규율 짓는 모범답안이 아니라고 넌지시 이야기한다.
그녀의 말인즉, 가끔 벽에 온통 낙서를 칠하고 싶은 충동처럼 판에 짜여있는 듯한 스타일을 벗어나 무언가 새로운 자극을 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자하는 취지에서 주택디자인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보통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이상스럽게 보이는 설치작가, 닫혀있는 것을 지극히 싫어하는 엘리트형 남편. 이 부부의 독특한 취향은 디자이너 최영옥의 작업세계와 섞이고 어우러지면서 투박스럽지만 개성적인 스타일로 집안 곳곳에 오롯한 감성을 배어들게 만들고 있다.
맨콘크리트의 물성이 잔잔하게 풍겨내는 이색공간으로의 초대는 방문객들에게 그리 편안히 첫인상을 전해주지는 않는다. 마치 칠하다만 콘크리트 그대로의 모습과 흡사 공사장에 온 것 같이 덕지덕지 매달려 있는 배관설비들….

하지만 가만히 몸담고 있노라면 가슴 저 깊은 곳에 숨쉬고 있던 순수본능을 자극하는 듯 새로움에 대한 한없는 욕구가 피어오르게 한다. 깨끗한 벽지와 페인트로 덧붙여지고 채색된 공간을 너무나도 싫어하는 집주인의 감성은 배관이 그대로 노출된 천장(마치 인체의 핏줄을 의미하듯 배관은 집안 곳곳을 긴밀하게 연결하고 있다.)과 맨살 그대로의 회색빛 순수성으로 표현된다. 화려하지 않음에 더욱더 빛나는 색의 향연이라고 할까. 바닥에는 황토색 느낌의 타일은 더없이 따뜻함을 느끼게 하고 투박한 질감의 콘크리트벽면 위에 미완으로 그려진 꽃과 나무의 그림은 완벽함을 거부하는 듯하지만 더욱더 인간적인 멋스러움을 보여준다.
흡사 버려진 황무지 군데군데 피어나는 생명의 정감어림처럼 빛이 나고 시간의 때를 간직한 조명, 가구, 소품들은 저마다 처한 위치에서 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닫혀있는 공간을 못 이겨하는 남편과 음식냄새가 집안에 퍼지는 싫어하는 작가의 성격은 적절히 열고 닫히는 방식으로 주거공간에 적용되고 있다.
부엌과 거실 사이의 벽면 일부를 반쯤 잘라낸 곳에는 투명한 글라스월을 끼워 공간의 차단과 개방이라는 두 가지 기능성을 충족시키고 있다. 이 글라스월 하부에 비스듬히 걸쳐놓은 거울은 못쓰는 창문틀을 재활용한 것으로 다이닝룸의 한쪽 벽면에도 연속되며, 내부의 상하공간을 다채롭게 담아내고 사방으로 다채로운 공간색을 확장시키고 있다.
욕실을 테마로 한 설치작가의 작품(크로매틱 센세이션의 ‘트윈-수건 화장실’)처럼 작가 김희경(클라이언트)은 욕실을 자신의 설치작품처럼 계획하였다고 밝힌다. 침실과 마주한 욕실은 통유리로 되어있어 방과의 소통을 취한다. 지극히 비밀스럽게 인식되는 욕실공간을 막힘없이 드러내 보임으로써 위선을 벗어내고 본능 그 자체로의 순수성에 접근하려고 한 것이다.
침실과 면한 화장실에는 벽을 잘라내고 유리를 설치하였다. 문을 닫고 잠을 잘 수 없는 남편의 성격을 배려한 것이다.

이렇듯 공간의 트임과 실험적인 공간처리는 생활의 강박관념에서 벗어난 거주자의 자유에 대한 발현이자, 작가에게 새록새록 영감을 주는 설치작업의 연속된 일상공간으로 다가온다.
공간의 확장과 개방은 발코니에도 어김없이 적용되고 있다. 대개 리모델링시 발코니를 없애려고 하는 경우와 달리 이 집에서는 발코니가 오히려 더 커진다.
아파트 발코니가 냄새나는 플라스틱 반찬통과도 같다고 여기는 클라이언트의 관념은 발코니를 독서를 하며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나게 한다. 발코니 한쪽에는 샹들리에가 앙증맞게 달려있고 오래된 듯한 선풍기, 싱그러움을 담은 자연이 펼쳐진다.
침실과 면한 곳에는 폴딩도어가 설치되어 문을 젖히면 시원스럽게 강을 향한 풍경이 맑은 공기를 동반하며 펼쳐진다.
이처럼 옥수동주택에서 디자이너는 작가의 심성을 잘 이해하고 자신만의 섬세한 감성터치를 이용하여 수수하면서도 개성감 넘치는 공간으로 풀어내고 있다.

디자이너 최영옥은 1996년 미국의 PDT 한국지사에서 컬러와 자재의 디자인 디렉터로 일하게 되었다. 본사에서 계획한 공간을 국내 실정에 맞게 적용하고 대체재를 찾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지만 수시로 미국을 오가면서 부산, 울산, 창원, 동래 등 제법 규모가 있는 백화점 프로젝트를 줄기차게 수행하였다.

디자이너는 자신이 선택한 작은 샘플을 통해 완성된 인테리어공간을 볼 때 자못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고 한다. 그렇기에 손바닥만한 샘플들이 실생활 공간에 적용되었을 때의 분위기를 잘 짚어내는 것이 컬러&자재 디자인 코디네이터에게는 중요하다고 밝힌다.

그녀가 코디네이션한 I-Park 펜트하우스 역시 이러한 그녀의 감성이 그대로 스며들고 있다. 화려함보다는 드러내지 않은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복층형으로 구성된 펜트하우스는 수직적 공간미를 한껏 연출하고 있다.
전체적인 컬러는 밝은 베이지 느낌의 벽면 속에 조화되는 조명이나 가구는 공간에 묻히고 짙은 색의 마루를 사용하여 깊이있는 한국적 감성을 표현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언뜻 보기에 연약해 보이기까지 한 디자이너 최영옥. 하지만 섬세하리만큼 치밀하며,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자신만의 공간색을 일구어 가고 있는 그녀이다. 이러한 디자이너의 넘치는 끼와 실험적인 디자인관이 앞으로 어떠한 형태로 거듭날지 지켜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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