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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된 후 진심으로 웃어본 적 있나요?

2004-06-21


언제나 직장인들로 붐비던 쿄우바시는 주말인 탓인지 한산했다.
회사들이 밀집해있는 삼성동을 연상케하는 이곳에 동경국립근대미술관 필름센터가 있었다.
동경국립근대미술관 필름센터에서는 지난 4월6일부터 오는 8월29일까지, 한국에도 잘 알려져있는 인형 애니메이션의 거장인 오카모토 타다나리(岡本忠成)의 전시회가 개최되고 있다.

무덥기로 악명 높은 일본의 여름은 정말 대단해서, 아침부터 물어물어 찾아간 타케바시의 동경국립근대미술관이 사실은(소위) 순수 미술 작품을 위주로 전시하는 본관이고, 필름센터는 쿄우바시에 따로 독립해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기절할 뻔 했다.
겨우 정신을 수습하고 쿄우바시의 필름센터를 찾았을 때, 진짜 난관은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리 취재를 위해서라도 내부 촬영은 안된다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적어도 한 달 전에 취재 기획서를 보내고, 각종 절차를 거친 뒤 비로소 취재가 가능하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허가를 받은 후에도 지극히 제한된 범위에 한해서 취재를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은 때로는 매우 아쉬운 일이다.
이런 사정으로 인하여 오카모토 타다나리 전시회의 생생한 사진을 직접 게재하지 못하는 점을 부디 이해해주시기 바란다.

전세계의 애니메이션 문화를 선도하고 있다고 자처하는 일본이지만, 자국내에서 애니메이션은 아직도 하위문화에 불과할 뿐이다.
2003년에야 비로소 대학에 처음 애니메이션학과가 생겼고, 지금도 애니메이션학과를 보유하고 있는 일본의 대학은 동경공예대학 한 곳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일본 내 애니메이션의 위치를 잘 반영해준다.
그 뿐인가. 보통 일본인에게 애니메이터하면 처음 떠오르는 이미지는 배고픈 직업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와 오시이 마모루, 안노 히데아키같은 스타 감독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밖의 수많은 애니메이터는 열악한 경제사정과 사회적 지위에 시달려야만 한다.

그런데 좀처럼 변하지 않던 일본이 최근 변하기 시작했다.
국립대학인 동경예술대학은 2005년 애니메이션을 공부할 수 있는 대학원을 요코하마에 설립할 예정이고, 국립 미술관들이 하나 둘 애니메이션에 관한 기획전을 개최하거나 준비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특히 보수적이기로 소문난 일본의 국립 미술관이 애니메이션에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는 것은 큰 변화가 아닐 수 없다.(지금은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가 된 무라카미 타카시와 나라 요시토모가 처음 국립 미술관에서 전시회를 개최했을 때, 30대의 젊은 작가가 국립 미술관에서 전시회를 한다는 것 자체가 큰 이슈가 되었던 나라이므로)
이런 점에서 국립동경근대미술관이 개최하는 기획전 <조형작품으로 보는 오카모토 타다나리 애니메이션의 세계> 는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오카모토 타다나리가 추앙받는 이유는 그가 단지 생생한 인형 애니메이션을 만든 작가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작품을 통해 은유적이고 세련된 방식으로 사회적 발언을 해왔으며, 정형화된 셀 애니메이션 일변도였던 당시의 풍토에 새로운 애니메이션 문화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는 1972년부터 동료 카와모토 키하치로(川本喜八郎)와 함께 애니메이션과 퍼펫쇼(puppet show)를 합친 퍼펫 아니메 쇼를 개최한다.
6년동안 지속된 이 애니메이션 행사를 통해 사람들이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가능성을 알게된 것은 물론, 인형 애니메이션의 사회적 인지도에 큰 공헌을 했다.
그는 애니메이션 영화제를 “사람들이 좀처럼 볼 기회가 없는 작품을 볼 기회를 만들고 관객의 반응을 적극적으로 이끌어내자”는 의도로 기획했다.

흔히 인형 애니메이션의 거장으로 불리는 오카모토 타다나리는 사실, 인형 애니메이션 뿐 아니라 셀, 종이 등 각종 기법을 이용해 그야말로 다양한 애니메이션의 가능성을 실험해왔다.
매번 다른 재료, 기법으로 작품을 만들어온 그라고 해도, 25년 동안 단 한번도 같은 방법으로 작품을 만든 적이 없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이번에 전시된 인형들을 보면 그가 얼마나 폭넓은 실험을 해왔는지 한눈에 알 수 있다.

“어른이 된 후 진심으로 웃어본 적 있나요?”
오카모토 타다나리가 1973년 퍼펫 아니메 쇼의 포스터에 내세운 문구다.
이는 오카모토의 작품의 특성을 그대로 반영하는 문구라 할 수 있다. 가식을 벗고 진심으로 웃을 수 있는 작품에 그는 도전했고 성공했다.
어떤 작품이든, 그의 작품과 마주하면 순수하게 울고 웃게 되는 것이다.
1990년 미야자와 켄지 원작의 <주문많은 요리점> 을 끝내 완성하지 못하고 갑자기 세상을 떴을 때, 그리고 남겨진 스탭들에 의해 <주문많은 요리점> 이 마침내 완성됐을 때 사람들은 그의 사회 풍자 정신에 다시 한번 박수를 보낼 수 밖에 없었다.

1932년에 태어나 1990년 세상을 떠난 오카모토 타다나리는 처음에는 평범한 일본의 산업전사로 살아갈 것 처럼 보였다.
오오사카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2 년 동안 회사원으로 근무하던 그의 인생은 일본대학 예술학부로 진학하면서 진로를 수정한다.
일본대학에서 애니메이션 제작을 배운 오카모토는 일본에서 처음 인형 애니메이션을 시작한 모치나가 타다히토(持永只仁)의 MOM프로덕션에서 애니메이터로 경험을 쌓은 후 주식회사 에코를 설립한다.
에코를 중심으로 단편 인형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온 그는 평면, 입체, 반입체 스타일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동시에 나무, 가죽, 종이, 점토, 플라스틱, 금속 등의 다양한 재료를 이용해 매 작품마다 색다른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 뿐 아니다.
(1970년)을 비롯해 세 작품에 수록된 <노래 시리즈(うたのシリーズ)> (1968-1970년), (1975-1986년), <남무이치뵤우속사이(南無一病息災)> (1973), <치키라바시(ちからばし)> (1976년), <오콘조루리(おこんじょうるり)> (1982)에서는 음악의 역할이 영상에 버금갈 정도로 커졌다는 큰 특징이 보인다.

전시관에 그가 수많은 작품에서 사용한 인형들은 물론, 그림 콘티와 카메라, 셀화 등이 전시되어 있다.
또 작품 별 전시대 옆에는 오카모토의 작품과 제작과정, 스탭과의 인터뷰를 볼 수 있는 영상도 함께 구비되어 있다.
인형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 전시관 유리를 박차고 나올 듯한 생생함을 자랑하고 있지만, 필름으로 재현된 그의 작품에서는 생명 그 자체가 느껴진다.
애니메이션은 무생물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라는 오카모토 타다나리의 생각이 성공적으로 투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눈물은 유리, 배경은 실크. 진짜로 보이지만 사실은 모두 진짜가 아니다. 모두 진짜처럼 보이는 비밀은 무엇일까.
오카모토의 작품은 단순히 인형 애니메이션, 혹은 셀 애니메이션으로 정의내리는 것은 쉽지 않다. 그 모든 기법을 합쳐서 작품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소위 ‘multi plan’이라는 그의 작업 과정을 을 예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여기에 등장하는 것은 오리 두마리와 연못. 먼저 오리의 실루엣은 털실로 표현된다.
그러나 털실은 힘이 없는 바, 아이디어를 짜낸 것이 털실 속에 철사를 집어넣는 것이다-지금은 당연히 생각하지만, 당시만해도 그다지 보편화되지 않은 아이디어였다
. 유리 위에 털실 실루엣의 오리가 놓여지고 그 위에 층을 더 만들어서 배경은 셀로 표현을 하고 그 위에서 촬영은 이루어지는 것.
대부분의 다른 작품 역시 마찬가지로 복합적인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오카모토 세계의 리얼리티는 바로 이렇게해서 탄생하는 것이리라. 1965년부터 1990년까지 30여편의 작품을 만들어온 오카모토 타다나리. 한 땀, 한 땀, 한 점, 한 점, 손 때가 묻은 그의 인형 작품들을 보노라면 국적을 넘은 예술혼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여름 휴가를 이용해 일본에 올 계획이 있는 분들이라면 전시회에 꼭 한번 들러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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