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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쳐 | 리뷰

“길게 말하지 맙시다”

2006-04-18

혹시 여러분은 '엘리베이터 테스트'라는 말을 들어보신적은 있었나요?
의미는 간단합니다. 엘리베이터에서 자신의 아이디어를 30초 안에 팔 수 있는가를 점검해 보는 겁니다. 만일 엘리베이터에 내 시나리오를 사 줄 영화 제작자와 함께 탈 기회가 생겼다면? 30초안에 그 높은 사람은 내립니다. 그 안에 팔 수 있을까요?

카피를 길게 쓰지 않는 게 유리한 시대입니다. 무조건 길이를 짧게 쓰자는 게 아닙니다. 할 말을 잘 압축하여 절묘한 시점에 들이밀자는 뜻입니다. 심지어는 한 단어도 쓰지 않는 게 훨씬 효과적일 때도 꽤 있습니다. 때로는 카피라이터이니까 뭐든지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살짝 벗어날 필요도 있습니다. 내 노력이 너무 숨는 것 아닌가 하고 불안해하실 이유도 없습니다. 물론 내가 쓰는 카피 길이에 따라 보수를 받는다면 상황은 달라지겠지만요.

오늘, 쓰고 싶은 문장을 써 놓고 한 단어씩 빼 보십시오.
하나씩 빼면 뺄수록 읽는 이는 궁금해지므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작가의 페이스에 말려들어 가게 마련입니다. 궁금하지 않은 건 읽지 않습니다.

영어단어와 같은 첫 글자를 따서 무슨 대단한 용어처럼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주위에 너무 많아서 저는 그러기 싫은데, 저도 오늘 하나만 소개해 드리려 합니다. 학창시절 작문 시간에 배운 글짓기의 ‘3S’입니다. “Simple, Short, Smart.”

이제는 더 이상 글자 수에 따라 돈 내는 전보를 쓰지 않지만, “자기 돈으로 전보를 친다고 생각해 보라”거나 “명함 뒤에 자기 아이디어를 요약할 수 없다면 그건 아이디어가 아니다”라는 선배 고수들의 충고도 있었지요.

더 쓰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오늘의 제목에 맞추어 저도 욕심을 줄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글ㅣ정 상수(오길비 앤 매더 상무)


광고1) Spinach(시금치)
커다란 말 풍선 안에 들어가 있는 ‘시금치’ 라는 굵은 글씨에 눈이 가지 않을 수가 없군요. 우리의 눈은 자연스레 화살표 아래로 내려갑니다. 선반에는 당연히 시금치가 있겠지요. 하지만 왼쪽 아래에도 뭔가 볼 것이 있으므로 다시 눈이 올라갑니다. 아! 치실 제품 광고였군요. 바로 이와 이 사이에 끼는 시금치 같은 음식의 찌꺼기를 이 제품으로 빼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 날 시금치가 제 자리에 없으면 어떡하죠? 상관없죠. 어쨌든 우리는 그 단어만 보고도 시금치 이미지를 연상할 수 있으니까요. 참 귀여운 생각입니다. 요즘은 마케팅 기술이 워낙 발달해서 맥주 사러 가면 그 옆에 마른안주를, 마른안주 사러 가면 그 옆에 고추장을 진열하지요. 감시 카메라가 내 구매 취향을 다 읽고 있어서 편하지만 한 편으로는 신경이 쓰이기도 합니다.


광고2) Found(찾음)
화면은 마치 분실한 물건 찾는 광고처럼 보입니다. ‘찾음’이라는 큰 글씨 아래에는 팝콘 한 알이 점잖게 앉아 있습니다. 그 아래를 보니 칫솔 광고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잘 빠지지 않는 음식 찌꺼기를 훨씬 잘 찾아내 준다는 카피는 굳이 읽을 필요도 없네요. 이 사이에 끼면 시금치만큼 잘 빼기 어려운 게 팝콘이지요. 얼마나 기뻤으면 이렇게 큰 사진을 보여줄까요? 시금치 광고를 만든 요하네스버그의 제작팀이 만든 광고입니다.


광고3) Plant more trees(나무를 더 심읍시다)
나무를 잘라 쓰기만 하고 더 심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를 극명하게 보여 주는 WWF(세계 야생동물 기금협회)의 아이디어. 언젠가 나무나 종이를 다 써 버리면, 광고 만들 재료가 없어 대형 옥외광고가 붙을 만한 자리에도 앙상한 철골만 남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새들도 둥지를 틀 데가 없어 여기에 사는 상상하고 싶지 않은 장면이 소개됩니다. 전 세계 사무실에서 앞면만 인쇄하고 무심코 버리는 A4 용지가 하루에 몇 장이 될까요? 어느 날 버림받았던 그 종이가 모두 모여 저를 공격하러 찾아오지는 않을까요? 힘주어 글씨 쓰면 맥없이 찢어져버리던 공책을 써 본 저는 아직도 무얼 쓰려고 책상에 새하얀 복사용지 한 장을 펴놓고 앉으면 엄숙해진답니다.


광고4) Dove
만화영화 ‘심슨 가족’에 나오는 마지 심슨의 머리 스타일은 한 눈에 그녀를 알아보게 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변신했습니다. 곱슬머리 방지 크림을 썼거든요. 그녀만의 독특한 캐릭터가 없어졌으니 이제 영화에 더 이상 출연하지 못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러나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는 그녀의 표정은 밝아 보입니다. 원래 곱슬머리거나, 잘 정리되지 않는 머리카락을 가진 분들은 나름대로 얼마나 고민이 많은데요. 카피는 “이제 당신의 머리카락에 새로운 물결이 찾아온다. 멋지게 만들어 주겠다” 는 당연한 이야기지만, 슬로건이 참 인상적입니다. “당신의 스타일을 고수하지 마세요” 광고에서 우리가 흔히 듣는 말은 당신만의 스타일을 만들라든지, 변신에 죄가 없다든지 하는 것들인데, 여기서는 좀 더 다르게 표현하여 신경 쓰이게 하고 있습니다.


광고5) Hutch의 공익 광고
만화에 길들여진 우리는 말 풍선을 보면 그 안에 글자가 들어갈 것으로 예상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말 풍선이 텅 비어 있어 우리의 눈을 끄네요. 풍선 아래를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군요. 운전하면서 잠깐 전화 통화하느라고 시야에서 가려진 그림은 유모차를 밀고 가는 엄마. 화면 아래에 소개되는 한 마디는 “운전하실 때 휴대전화 쓰지 마세요. 허치가 보내 드리는 공익 메시지” 카피는 건조하지만, 앞의 시각 요소가 충분히 세다면, 굳이 카피에서 재주 부릴 필요 없지요. 사실 살다 보면, 머리를 굴릴 짬도 없이 순식간에 일이 벌어져 원상태로 되돌리기 어려운 일이 많으므로 조심해야 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연극 무대에서 대사를 잊었다고 “다시 한 번 하면 안 될까요?”라고 관객에게 양해를 구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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