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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덕트 | 리뷰

한국 자동차 디자인의 첫 시도 “시발자동차”

2011-01-31


1945년 광복과 남북의 분단, 50년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한국의 근대사는 격동하는 정치적 상황과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혼란스럽고 암울한 시기였다. 전쟁은 모든 것을 무참히 파괴해 버렸고 대중의 삶을 빈사상태에 이르게 하였다. 대부분의 산업시설과 사회기반시설이 파괴된 폐허 위에서 사람들은 미국의 경제 원조에 기대어 빈손으로 자신의 삶터를 일구었다. 각종 소비재만이 아니라 먹을거리와 살 집에 이르기까지 미군의 원조 없이는 일상적 삶을 지탱할 수 없었던 시대였다.

글 | 이옥분 디자인학 박사
에디터 | 최동은(dechoi@jungle.co.kr)


사람들은 미국에서 들어온 무엇이든 가져다가 일상에 필요한 물건으로 대체해 사용했다. 물건이 담겼던 골판지나 나무 박스는 판잣집의 벽체와 지붕으로 사용했고 통조림 깡통으로는 그릇에서 재떨이, 등잔 뿐 아니라 단추, 필통 등 다양한 물건을 만들었다. 담요를 잘라 만든 외투, 꿀꿀이죽, 드럼통을 펴서 만든 자동차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이 시대를 버텨내기 위해 필요했다. 이러한 물건들은 물질적, 정신적 궁핍 속에서 살아야했던 이 시대의 참혹한 현실을 드러내며 ‘깡통문화’라고 불려졌다. 그러나 깡통문화가 비참한 이 시대를 대변하는 말일지라도 이러한 삶의 모습은 주어진 물리적 환경을 최대한 이용하여 자신이 처한 삶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노력이 만든 자발적, 자생적 문화의 한 현상이었다. 이러한 역동적이고 긍정적인 삶의 의지는 우리의 일상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산업에 걸쳐서도 원동력이 되어, 이후 성공적인 산업화를 이룩하는 힘이 되었다.

1955년 제작된 시발은 이러한 폐허의 환경에서 태어났다. 깡통문화로 대변되는 이 시대의 자생적 힘은 탈것의 문제도 스스로 극복해 나가는 힘을 보여주며, 한국의 첫 국산자동차를 제작해내기에 이르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전쟁 수행에 필요한 무기와 탄약, 식량 등의 물자를 수송하는 자동차와 석유를 싣고 온 드럼통이 넘치도록 들어왔다. 시발은 전후 남겨진 이러한 물자들을 활용하여 생활에 필요한 차량으로 태어난 것이었다. 2.5톤 GMC 트럭의 차대는 버스를 만드는데 이용되었고, 3/4톤 무기수송차의 차대는 합승차가 되었으며, 군용드럼통은 차량의 차체를 만드는데 활용되었다.

군용 차량의 엔진과 차축을 가지고 망치로 드럼통을 두드려 맞춰 버스를 만들어내는 기술은 이미 1940년대 후반부터 쌓아 온 노하우였다. 이렇게 한두대씩 맨손으로 트럭을 만드는 일은 ‘생산’이라 하지 않고 ‘꾸민다’고 말했다. 자동차를 한대씩 꾸며보는 일은 40년대 정비업체들 간에 간혹 있는 일이었다. 오늘날 현대자동차로 성장한 현대자동차공업사도 정비업을 하면서 트럭을 몇 대 꾸민 적이 있었다. 자동차수리보다 꾸미는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기업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기존 부품을 재생하여 다른 종류로 변형한 차량이 많아졌다. 이러한 업체들 중에서 국제차량공업, 신진공업, 하동환자동차가 유명했다. 전쟁을 겪고 기계공업도 전무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재생자동차 제작이 활발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미군용차를 수리할 때 버려지는 폐품이 엄청나게 많이 나왔고, 미군창고에서 흘러나오는 부품도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재생자동차 제작은 이러한 부품을 활용해 일어났고, 붐을 형성할 만큼 활발해졌다.

국제차량의 최무성은 자동차 수리와 재생차 제작에서 얻은 조립기술을 이용해 국산차를 만들 계획을 세웠다. 국제차량은 이미 1954년에 열린 산업박람회에서 재생 지프로 차체 장려상을 받았을 만큼 당시로서는 최고의 재생자동차 제작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최고의 재생 기술을 보유하고 있더라도 필요한 부품이 1만 여개나 되는 자동차를 만든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무모한 계획처럼 보였다. 하지만 국제차량은 미군에서 흘러나온 부품을 활용하고 일부는 원 부품을 모방하여 직접 만들어 내면서 해결점을 찾아 나갔다. 예를 들어 차량제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차대와 엔진이었는데, 차대는 미군정에서 불하받아 용접하여 붙이고 망치로 때려 맞추어 재생했고, 엔진은 일부 부품의 자체 제작을 시도해 조립했다. 미군정은 가동이 가능한 자동차일지라도 폐품으로 불하하면서 차대는 대개 절단하고 엔진 등의 부품도 재생이 어렵도록 해체하여 고철로 팔았기 때문에 부품마다 재생할 수 있는 조건을 고려하여 각기 다른 방도를 강구해야 했다. 차대를 비롯해 대부분의 부품은 재생이 가능했지만, 엔진은 부분적으로 파손되어 재생이 어려웠고 수량 확보도 여의치 않아 가장 어려운 문제였다.

엔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발자동차는 ‘함경도 아바이’라고 불리는 기술자를 중심으로 엔진의 국산화에 들어갔다. 함경도 아바이라 불린 사람은 전쟁 중 원산에서 선박의 수리와 정비를 하면서 오랜 동안 기계 부품을 해체하고 수리하며 몸으로 익힌 경험이 많았던 사람이었다. 함경도 아바이는 오랜 경험과 열정만을 가지고 엔진 제작에 몰두했다. 엔진 부품의 형틀을 만들고 쇳물을 부어 주조하고 가공하는 과정을 되풀이 하면서 여러 차례의 실패를 거쳤다. 노력 끝에 만들어낸 엔진은 미군 지프의 원래 엔진을 들어내고 대신 얹어 실시한 시험 주행에서 시동이 걸리고 잘 달려주었다. 국산 엔진은 이처럼 미군 지프의 4기통 엔진을 모델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각고의 노력 끝에 탄생했다. 이 차는 “처음으로 출발한다” 뜻으로 “시발’”(始發)이라 이름 붙었고, 1955년 광복 10주년 기념 산업박람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았다. 시발은 망치산업이라 불리는 공업수준에서 수작업으로 태어났지만, 우리나라에서 만든 최초의 국산승용차로 한국자동차공업의 탄생을 알리는 시발점이 되었다.

시발자동차의 의미는 첫 국산자동차였다는 데에 그치지 않았다. 어떠한 기계 공업도 마련되어 있지 않던 척박한 땅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재료와 형태의 가공법을 찾아 지혜를 발휘한 첫 ‘국산디자인’ 이었다. 철판을 공급해 줄만한 공장이 없었던 당시 군용 드럼통은 가장 쉽고 싸게 구할 수 있는 재료였으며, 또한 철판이 두꺼워 차 사고에도 안전했고 고치기도 쉬운 최적의 재료였다. 시발자동차의 제작자들은 드럼통을 잘라 망치로 펴는 수공 작업에서 보다 효율적인 제작공정을 개발하고 미적 감각을 발휘했다. 예를 들어 시발자동차가 본격적으로 생산되면서, 밤새 차를 만들어도 주문에 따라 가지 못할 만큼 제작량이 많아지자, 드럼통을 일일이 손으로 펴는 것조차 어려워졌다. 철판의 가공공정을 줄이기 위한 새로운 아이디어로 드럼통을 절반으로 잘라 대충 편 다음에 한밤중에 서울 을지로 큰길에 내다 놓았다. 그러면 그 위로 미국 GMC 쓰리쿼터가 지나다니며 손으로 편 듯 납작하게 만들어 주었다. 시발자동차는 이렇게 펴진 철판을 손으로 정교하게 다듬어서 지프보다 세련된 형태로 다듬어 나갔다.

실상 한국전쟁에 참전한 지프는 자동차에 필요한 최소한의 기계부품으로만 구성되어 어떤 지형적인 조건에서도 잘 견디며 다목적인 전쟁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기능만을 반영한 디자인이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생활환경에서는 맞지 않았다. 시발은 지프를 모방했을지라도 일상에서의 기능과 미감을 고려해서 디자인했다. 하드탑의 지붕을 얹어 객실을 만들고, 도로 주행에 적합하도록 세부 형태를 계획하고 장식적인 미감도 반영했다. 시발의 라디에이터 그릴은 지프의 평평한 모양에서 V형으로 돌출되도록 변형했는데 이 모양이 당시로서는 세련되게 보여 반응이 좋았다고 한다. 이처럼 시발자동차가 지프의 차대와 부품을 이용해 그 모양을 따라 만들어졌지만, 결과적으로 생활의 필요와 미감을 반영하려는 노력이 덧붙여지면서 자연스럽게 시발의 디자인은 지프와 달라졌다. 그리고 점차 제작량이 많아지면서 여러 가지 다른 디자인이 시도되었다. 이것은 제작 시기와 단계마다 재료의 가공과 조립의 조건에 따라 유동적으로 대처함으로써 완성되는 차량이 각기 다른 형태가 되어버린 이유도 있지만, 제작 경험이 쌓이면서 또 다른 시도를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반증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시발자동차는 자동차를 만들 수 있는 어떠한 조건도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주어진 조건을 최대한 활용하여 더 나은 생산의 조건과 디자인으로 개선하려는 의지의 결과였다. 이러한 작업은 제작자의 암묵적인 지식과 시대의 감수성을 바탕으로 한 미적 감각의 실천이었으며 삶과 밀착된 디자인이었다. 시발자동차는 이렇게 태어난 한국의 첫 자동차 디자인이었다.



<참고문헌>

한국자동차공학회,『자동차공학회지』1999/6
강명한,『한국차, 브레이크가 걸렸다』정우사, 1998
(주)자동차생활,「CAR LIFE」,1992/5. 1993/5
존 헤스켓, 『산업 디자인의 역사』시공아트, 2004
박해천 외,『한국의 디자인』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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