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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 리뷰

무한궤도

월간 사진 | 2017-06-13

 

 

김레나의 작업은 지극히 사적인 것들에서 시작한다. 그녀가 흑백 아날로그 작업을 통해, 그리고 사진을 통해 확인하고 싶은 것은 반복되는 시간 속에 살고 있는 자신의 가치다.


〈Time Leap〉 ©김레나

〈Time Leap〉 ©김레나


망각의 시간을 붙잡다

영겁의 시간 동안 인간은 몇 번의 괴로운 생존을 되풀이하는 것일까. 드라마 〈도깨비〉 지은탁은 말한다. “인간에게는 씨를 뿌리는 생, 뿌린 씨에 물을 주는 생, 물 준 씨를 수확하는 생, 수확한 것들을 쓰는 생, 총 네 번의 생(生)이 있다.”고. 그런데 왜 우리 머릿속에는 그 어떤 생의 기억도 남아있지 않은 것일까. 저승으로 가기 전 잠시 들른 망자의 찻집에서 저승사자가 건네준 ‘망각의 차’를 마셨기 때문일까.

비록 전생의 삶을 전부 기억하진 못하지만, 현생의 삶을 돌아보며 기록하고 또 기억하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하는 사진가가 있다. 바로 김레나다. 그녀는 필름 촬영과 흑백 아날로그 프린팅을 고집한다. 흘러가는 시간을 자신의 품 안에 붙잡겠다는 의미다. 김레나의 작업 〈Time Leap〉 속 시간의 의미는 ‘달아나는 시간’, ‘다시 오지 않는 순간’, ‘이미 지나간 시간’, 그리고 ‘바로 지금’이다. 여기서 그녀가 왜 아날로그 방식을 고수하는지를 유추할 수 있다. 디지털 방식과 달리, 아날로그 방식은 촬영부터 인화, 저장까지 직접 손으로 만지며 작업해야 하기 때문이다. 육신이 소멸한 뒤에도 계속해서 실물로 남아있는 건 아날로그 사진이라는 사실이 바로 김레나 작업의 핵심이다.

〈Time Leap〉 ©김레나

〈Time Leap〉 ©김레나


시간이란 에너지의 반복

다섯 개의 시리즈로 구성된 〈Time Leap〉는 피난 중 죽음의 순간이 가까워지자 지나간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는 외할머니의 이야기에서 시작됐다. 한때는 최고의 순간이라 믿었던 것들을 잊은 채 살다가 생의 마지막 순간 짧게나마 다시 마주하게 된다는 것이 안타까웠을까. 그때부터 김레나는 자기 주변을 당시 느낌에 따라 사진에 담았다. 소멸하는 것들을 기억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작업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결론은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긴 인생의 아주 사소한 부분일지라도 기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진들을 영상으로 변환했고, ‘반복 효과’를 반영하듯 영상을 무한대로 재생했다. 그러던 어느날 외할머니가 돌아가셨고, 얼마 안 가 지인의 아이가 태어났다. 짧은 시간 내에 소멸과 탄성을 경험했다. 문득,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이 어떤 큰 에너지의 반복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나’라는 사람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의문도 들었다고 한다. 이러한 의문에서 탄생한 것이 〈Time Leap〉 ‘사진’ 시리즈다.

〈Time Leap〉 ©김레나

〈Time Leap〉 ©김레나


소멸과 생성의 무한루프

이 시리즈는 외할머니 49재와 지인의 분만 과정을 기록한 사진들이 주를 이룬다. 사진들은 대체로 어두운 톤을 유지한다. 생명의 탄생을 다루고 있음에도 말이다. 이는 김레나가 작업을 대하는 태도 때문일 것이다. 그녀에게 작업은 스스로를 이해하고 넘어가는 과정이자 개인을 부수고 세계로 들어가는 과정이다. 소멸과 생성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어두움과 밝음)로 접근하는 것이 무리인 것이다. 고난도 작업이거니와, 아직 자신의 가치를 명확히 파악하질 못했으니 사진들이 어두운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지도 모르겠다.

김레나의 작업은 말 그대로 ‘소멸과 생성의 무한루프’다. 그런데 한 가지 혼란스러운 점은 소멸과 생성이라는 큰 틀 안에 새로운 사진들이 투입되면서 작업의 맥락을 읽기가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지극히 사적이던 사진들 틈으로 사회적 기억이 개념으로 침투한 까닭이다. 예를 들어, 수영장 사진을 처음 보았을 때는 산모의 양수가 떠올랐는데, 실제로는 사진에 반영된 것은 세월호 참사라고 한다. 보는 이의 관점에선 해석의 다양화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작업하는 입장에선 급격한 기어 변속이다. 

〈Time Leap〉 ©김레나

〈Time Leap〉 ©김레나


작업의 최종 목표가 소멸과 생성의 반복 속에서 ‘나’를 알고 세계로 들어가는 것인데, 중간 단계를 건너뛴 것처럼 느껴진다. 거시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개인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구분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만, 지금 단계에선 작업을 구성하고 보여주는 방식을 단순화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자신을 옭아매는 작업에서 무리하게 ‘무한대(∞)를 그리려다가 팔자(八字)가 쓰러지는 일’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김레나 www.annalena.org
명지대학교 철학과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17년 상반기 공간291 신인작가다. 필름과 종이를 통한 사진의 물성에 관심이 많으며, 이를 기반으로 한 기록 위주의 작업들을 하고 있다. 2013년 개인전 〈Forgotten secret(vol. 1)〉 포함, 다섯 번의 전시회를 개최했다.



에디터_ 박이현

디자인_ 김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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