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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 리뷰

당신을 요리하고 싶어, 영계 아가씨

2017-02-02

 


 

“이렇게는 처음이에요.”, “지금까지 아무도 당신을 바삭하게 구워주지 않았다고?”로 시작하는 <치킨의 50가지 그림자>. 식욕 돋게 하는 요리책일까, 아니면 파격적인 로맨스물일까.

 


 

2012년 여름, 전 세계 여성을 들었다 놨다 한 로맨스 소설이 있었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이후 동명의 영화로도 만들어져 ‘엄마들의 포르노’라 불리며 엄청난 성적을 거두기도 했다. 맞다. 요리책 <치킨의 50가지 그림자>는 이 희대의 베스트셀러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패러디했다. 책에는 총 50가지의 치킨 레시피가 소개돼 있는 만큼, 얼핏 요리책 같지만 사실 요리책이라고 하기엔 의심스러운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첫째, 영미소설 섹션으로 분류돼 있으며, 전반적으로 소설의 플롯을 따른다.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을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역시 마찬가지다. 발단: 순진한 영계와 지배적인 요리사는 처음 만난 순간부터 서로에게 끌린다, 전개: 영계는 서로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 생각하며 요리사를 잊으려 하지만, 곧 그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깨닫는다, 위기: 하지만 요리사가 원하는 건 평범한 요리가 아닌 깊고 어두운 무엇이었다. 절정: 고기망치와 가위, 끈 뭉치 등 요리사의 숨겨진 비밀을 알게 된 영계는 곧 거부할 수 없는 본능에 눈뜨게 되는데…. 

 

둘째, 챕터명은 아찔하고, 사진은 관능적이다.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날 부드럽게 두들겨 줘요’, ‘목욕하고 나온 그녀’, ‘활짝 벌린 허벅지’. 당신 같으면 이 제목을 보고도 요리책이라고 말할 수 있겠나? 책 중간중간 (감질나게) 삽입된, 뽀얀 생닭을 묶고 주무르는 나체의 요리사 사진은 또 어떠한가. 바짝 갈라진 복근과 불끈 솟은 힘줄, 그 와중에 가늘고 긴 손가락은 또 뭐람. 저 손에 격하게 요리되는 한 마리의 생닭이 되고 싶, 이것 봐. 요리책이라는데 자꾸 곤란한 상상을 하게 한다. 괜히 나만 이상한 사람 된 것 같고 막, 이러니까 내가 요리책인지 아닌지 헷갈린다는 거다.

 

  

 

 

아무튼 결론은 이 책은 요리책이 아니다. 아니, 요리책이 아니어야 한다. 그럼에도 적극적으로 요리책이 아니라고 단정하기엔, 책 표지에 적힌 ‘요리책으로 패러디했습니다’라는 문구가 영 찝찝하다. 따라서 나는 이쯤에서 판단을 독자에게 넘기기로 한다. 책에 소개된 닭 요리에 꼭 필요한 스킬 3가지를 있는 그대로 옮긴다. 순수하게 요리법이 떠오르는지, 음흉한 생각은 정말 1도 안 나는지 천천히 읊조려보기 바란다.

 

1 밧줄 묶기 in 귤과 세이지를 곁들인 로스트치킨

“그는 내 양 발목을 합쳐 단단히 묶는다. 노끈은 꽉 묶여 있지만 살갗에 파고들 정도는 아니다. 나는 구속감과 함께 기묘한 해방감을 느낀다. 내 등골을 타고 전기가 오르듯 위험한 전율이 찌릿찌릿 치민다.” (p47)

 

2 마사지하기 in 아리사, 절인 레몬, 병아리콩, 민트를 곁들인 로스트치킨

“아야야, 따끔따끔해. 하지만 금세 내 살갗은 그 감촉에 팔딱거리며 노래 부른다. 그는 솔로 내 목과 어깨를 부드럽게 쓴다. 솔이 지나가는 곳마다 뜨거운 불이 주르르 피며 급기야 저 아래 그곳까지 이어진다. 아, 젠장, 뜨거워.” (p56)

 

3 찰싹 때리기 in 겨자, 신선한 바질, 마늘을 곁들인 로스트치킨

“‘칼’이라고 외쳐! 찰싹. 

‘잡’이라고 외쳐! ‘이’라고 외쳐! 찰싹 찰싹. 

외쳐, 칼! 외쳐, 잡! 외쳐, 이! 찰싹, 찰싹, 찰싹.” (p60) 

 

 

<치킨의 50가지 그림자>, F. L. 파울러 지음, 황금가지, 232쪽, 14,800원

<치킨의 50가지 그림자>, F. L. 파울러 지음, 이지연 옮김, 황금가지, 232쪽, 14,800원


 

※ 참고로 디자인 매체에서 웬 요리책이냐 하고 반문할까 봐 짚고 넘어가자면, 디자이너이기 이전에 우리가 어떤 민족인가? 1인1닭의 민족 아니던가. 무릇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자신만의 치킨 요리법 하나쯤 갖고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 게다가 시각적으로도 뛰어난 이 책은 디자이너에게 특히 추천할 만하다. 감각적이고 아름다운 사진은 디자인 작업에 대한 욕망을 솟구치게 할 것이며, 치킨에 대한 다양한 요리법은 밤샘 작업으로 굶주린 당신을 (눈으로나마) 배부르게 할 것이다.

 

 

 

에디터_ 추은희(ehchu@jungle.co.kr)

사진제공_ 황금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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