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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쳐 | 리뷰

[스토리×디자인] 굿바이 추억의 기차역이여, 흘러간 스위스 연방 철도 디자인

2019-09-02

교통-일-생활 종합공간 SBB CFF FFS

 

요즘 출간되는 최신판 스위스 관광 관련 책자나 인터넷 여행 가이드에서는 스위스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이 꼭 들러가야할 새 관광 목적지로 취리히 에우로파-알레(Europaallee)를 등재시켰다. 미국의 경영자문기업 머서(Mercer)가 매년 실시하는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순위 발표에서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와 더불어 가장 살만한 도시로 인정받는 스위스 최대 도시 취리히(Zurich).

 


아르놀드 암즐러(Arnold Amsler), 산티아고 칼라트라바(Santiago Calatrava), 베르너 뤼거(Werner Rüeger)가 설계한 취리히 기차역 슈타델호펜(Zürich-Stadelhofen) Photo: ⓒ Paolo Rosselli

 

 

취리히 중앙우체국 뒤편, 역을 남서쪽으로 둘러싸고 있는 스위스 연방 철도(Schweizerische Bundesbahnen, SBB)의 소유지 약 7만 8천 평방미터 부지에 건설되는 이 에오로파-알레는 신흥 개발 럭셔리 종합 생활 단지를 표방한다. 2009년에 착공에 들어간 지 10년째 접어든 지금도 총 8단계 건설구역에 걸친 공사가 한창인 가운데 취리히 교원대학 본부, 신 SBB 사무실 건물, 거주용 아파트, 쇼핑거리, ‘코즈모스(Kosmos)’ 문화센터 겸 영화관이 우선 완공을 마치고 사용에 들어갔고, 에우로파-알레 현대식 종합 생활단지는 2020년중 최종 완공을 앞두고 있다.

 


“길 떠나는 자를 보호해 주소서!” 2018년 취리히 기차역 중앙홀에 설치됐던 높이 11미터, 무게 1.2톤의 거대 조각은 니키 드 생팔의 작품 〈수호천사(일명 ‘나나’)〉로 스위스 연방철도 설립 150주년을 기념해 보안업체인 시큐리타스가 증정한 선물이다. Image: sbb.ch

 

 

역 주변의 흔히 그러하듯 과거 심야 거리 부랑자나 취객이 목격되는 어수선한 곳이란 오명을 떨쳐내고 취리히의 새랜드마크로 거듭날 것을 겨냥한 에우로파-알레는 본래 2003년부터 계획된 지역 재활성화 프로젝트다. 이 슈퍼 럭셔리 부동산 개발 프로젝트로 취리히와 연계되던 오래된 도시라는 인상을 쇄신하고 정체돼 있던 취리히 기차역 주변을 현대적이고 고급스러운 구역으로 업그레이드하게 된다. 에우로파-알레 개발 프로젝트는 스위스 국민들과 도시개발 전문가들 사이 3년 가까이 극열한 찬반 논란을 모으며 2006년 시민 의견 수렴 투표를 거쳐 투표자 65%가 찬성한 결과 추진된 화재의 도심 사업이다.

 


모두가 취리히 기차역 주변 신건축 사업을 반기는 것은 아니다. 최근 런던에서 취리히로 본사를 이전한 타일러 브륄레 〈모노클〉지 설립자 겸 편집인은 취리히 기차역 신건축과 에우로파-알레 프로젝트를 예로 들어 도심재생사업이라는 명목 아래 과거 건축유산을 파괴하기보다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돌프 뷜러(Adolf Bühler)가 설계한 베른 아르강의 고가교는 스위스 토목공학 기술의 대가로 꼽힌다. 1941년 완공. Photo: © Georg Aerni, 2012

 

 

취리히 기차역은 현재 스위스에서 가장 분주한 기차역이자 SBB가 운영하는 역들 중 가장 큰 간판급 기차역이다. 취리히 기차역에서 멀지 않는 곳에 자리한 취리히 디자인 뮤지엄(Museum für Gestaltung Zürich)에서는 취리히 기차역을 둘러싼 에우로파-알레의 임박한 완공을 기념하며 SBB의 디자인적 의미를 되새겨보는 전시회 ‘SBB CFF FFS’를 마련하고, 스위스 연방 철도국의 추억 어린 과거에 안녕을 고하고 새로운 미래를 만나자며 아쉬워하는 관객들의 마음과 여론을 쓰다듬는다.

 

트릭트와 로베르트 하우스만(Trix and Robert Haussmann)이 1992년 설계한 취리히 중앙역 역사 내부. Institut gta, Photo: ⓒ Nick Brändli

 

 

19~20세기 전환기 철도망이 구축되기 시작하던 유럽에서는 도시설계 과정에서 기차역을 도시의 상업구역과 번화가에 위치하는 도시구획 전략을 따랐다. 물론 기차역 주변 도시 구획 정책 변화에 따라 기차역도 변천한다. 지금 취리히 기차역 주변은 초기에는 남서 중앙역(HB Südwest)으로 탄생했다가 지난 50여 년 동안 유로게이트(Eurogate)로 불려 오다가 21세기 들어 에우로파-알레로 거듭났다. 취리히 중앙역에 일찍이 1959년부터 세운 스튜디오형 영화관은 건축가 막스 포그트 (Max Vogt)가 설계한 스위스 모더니즘 건축의 대표작이다.

 


에밀 파에시와 에마누엘 라로슈가 공동 설계한 바젤 중앙역, 1907년 완공. Photo: ⓒ Lichtdruckanstalt Alfred Ditisheim

 

 

스위스의 또 다른 아이콘적 기차역은 바젤역이다. 에밀 파에시(Émil Faesch)와 에마누엘 라로슈(Emanuel LaRoche)가 설계해 1907년에 완공된 이 역은 오늘날까지 세계를 바젤시로 안내하는 첫 관문이자, 작고 부유한 상업 도시 바젤의 첫인상과 성격을 총집결한 대표적 초기 근대 양식 건축물이다. 근대적 진보, 과학기술, 스피드와 이동의 자유의 심벌인 기차역에서 외부로 나오면 하차객의 눈앞으로 도심의 번화한 상업구역과 역동적인 인간활동이 벌어지는 도회 공간이 펼쳐진다. 도시와 한 몸이 되어 융화되는 느낌을 선사한다는 이곳에는 20세기 초엽의 신사고적 철학와 세계관이 담겨있다.

 


페터 슈팔링거(Peter Spalinger)가 운영한 디자인 스튜디오 아텔리에 슈팔링거(Atelier Spalinger)가 1992년 디자인해 소개한 취리히 중앙역사 내부의 승객 안내데스크와 시계 탑. Photo: ⓒ Museum für Gestaltung Zürich/ZHdK, 2014

 

 

스위스 철도국은 애초부터 아이덴티티 구축에 건축과 그래픽 디자인을 적극 활용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커뮤니케이션 디자인 분야에서 획기적인 사례로 꼽히며 오늘날 스위스인들의 뇌리에 깊이 잠재해 있는 역사 내 그래픽 디자인 스타일은 근대 그래픽 아티스트 요제프 뮐러-브로크만(Josef Müller-Brockmann)이 디자인한 적확, 명료한 시각적 양식과 서체에 기초해 디자인됐다. 그가 시각화한 철도 시스템 콘셉트, 철도운행 시간표, 철도노선도, 역내 안내판 일체는 오늘날 디자인사에서 문자 사용을 최소한으로 줄이고도 추상화·양식화된 이미지 만으로 효율적으로 읽히고 소통할 수 있음을 보여준 스위스 그래픽 디자인의 백미라 평가된다.

 


요제프 뮐러-브로크만과 페터 슈팔링거 협력으로 1992년 디자인된 SBB 승객 정보 시스템 픽토그램 중에서. Graphics Collection ⓒ SBB AG and Museum für Gestaltung Zürich

 

 

기차라는 대중교통수단만큼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필수불가결의 이동수단이자 일상생활 속의 자연스러운 일부분이 또 어디 있을까? 기차역은 근대 모더니즘의 가장 상징적 공간으로서 건축-산업디자인-시각디자인-과학기술이 한 공간 안에 집결된 디자인의 종합 무대이기도 하다. 스위스 철도와 주요 도시 역사 건물은 설립·구축된 지 약 100여 년(1902년 1월 1일 창설)이 된 지금, 독특한 스위스적 디자인 문화가 표현된 물적 유산의 타임캡슐이다.

 

한스 힐피커(Hans Hilfiker)가 디자인한 SBB 역사 내 시계, 원 디자인 연도: 1944년, 1952년 재디자인 됐다. ⓒ SBB A 

 

 

‘스위스 스타일’ 그래픽 디자인의 아버지 뮐러-브루크만은 ‘교통 디자인 = 시스템 디자인’이라는 콘셉트를 구축한 장본인이다. “디자인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스위스의 사회학자 겸 경제학자 사회학자 루치우스 부르크하르트(Lucius Burckhardt)는 1980년 이렇게 말했다. 디자인이란 사물 그 이상의 비물질적이고 정신적인 영역을 파고드는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뜻이다. 예컨대 한때 애플 아이폰이 흉내 냈다가 저작권 침해 소송에 패소한 바 있기도 한 그 유명한 스위스 기차역 시계(Swiss station clock)는 칼같이 시간 잘 지키기로 정평 난 스위스 철도 뿐만 아니라 이 나라 문화 일반을 디자인으로 대변한 세계적 아이콘이 됐다.

 


광고 대행업체 영 앤 루비캠 (Young & Rubicam)이 선보인 “시계처럼 운행합니다(Wir fahren mit Takt)” 통합 노선표 포스터 디자인, 1982년. SBB Historic, Poster Collection ⓒ SBB AG

 

 

기차역은 특유의 소리를 내는 감각적 공간이기도 하다. 열차가 출발하고 도착할 때 철로와 차륜이 부딪히며 내는 날카로운 마찰음, 서서히 출발하며 덜컹이는 소리를 내는 철로, 역내 홀 안에서 울려 퍼지는 안내원의 안내 방송이 내는 역내 음향, 달리는 열차 바퀴가 철로 사이 틈을 지날 때마다 내는 반복되는 리듬, 기관차가 달리면서 내는 칙칙폭폭 소리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기차와 결부된 이 청각적 효과들은 기술의 발전과 신소재 덕분에 과거 속 아련한 추억의 뒤안길로 하나둘씩 사라져가고 있다.

 

기차는 기차와 승차객 모두에게 열차 여행의 시작점이자 종점이며 여정 일부의 독특한 경험이자 움직임과 휴식이 공존하는 역설의 공간이기도 하다. (왼쪽)발터 헤네(Walter Henne), 트랜스 유럽 엑스프레스(TEE) 내 식당 열차, 1961년 ⓒ SBB Historic (오른쪽)디자이너 안드레아스 뷔르키(Andreas Bürki), 울리 후버(Uli Huber), 웰리 탈만(Ueli Thalmann)의 광고 사진, 일반열차 2등석의 낭만, 1982년. Photo: ⓒ Renate Meyer

 

 

오늘날 스위스는 유럽에서 가장 복잡하고 고밀도의 철도망을 구축한 나라다. 여행이 보편화된 지금, 자유로운 이동만큼 기본적인 인간의 욕구가 또 어디 있을 것이며, 또 민주적인 대민 서비스가 또 어디 있을까. 영국의 사회학자 앤소니 기든스(Anthony Giddens)은 〈현대사회학〉이라는 책에서 20세기 유럽의 근대화는 교통수단과 정보통신의 극적인 발전 덕분에 가능했다고 했다.

 


작자 미상의 스위스 철도에서 일하는 열차 차장용 빨강색 가방, 1937년. Photo: ⓒ SBB Historic, 1964

 

 

스위스 기차역 시계, 빨간색 십자가 이미지를 딴 SBB 로고, 지난 150년 동안 은근한 디자인 리뉴얼을 거치며 변해온 스위스 건축사무소 EM2N(Mathias Müller와 Daniel Niggli) 설계의 취리히 역 사무실 등은 하나같이 단도직입적이고, 깔끔 정갈한 스위스 디자인 스타일을 대표한다. 허나 세월이 변함에 따라 사물과 콘셉트도 변하는 법. 다단계 완공을 거쳐 오는 2020년 드디어 전체 완공이 예정되어 있는 취리히 기차역 건물과 에우로-알레 초현대식 종합 생활구역의 공공 공간에서는 더 이상 검정-흰색-빨강 삼색 위주의 스위스풍은 온데간데없어졌다.


Studio Marcus Kraft, exhibition poster SBB CFF FFS, Museum für Gestaltung Zürich, 2019, ⓒ ZHdK

 

 

대신 그 자리엔 본래 뮐러-브로크만(Müller-Brockmann)이 디자인했던 SBB 로고 시스템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정비한 마르쿠스 크라프트 스튜디오(Studio Marcus Kraft)의 새 로고 시스템과 한결 서늘하고 글로벌 경도의 고광택 바닥과 표면재로 마감된 매끄럽고 부티나는 초현대식 공간과 디지털 안내판이 들어섰다. 지금은 21세기판 국제 도시설계 및 건축과 시각 디자인이 전 세계 구석구석을 동일하게 지배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과거 그 언제보다도 많아진 승하차객들이 장애없이 자유롭고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는 민주적인 교통수단 역할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기차와 기차역도 시대에 맞춰 변화해야 하니까 말이다. 

 

글_ 박진아 미술사가·디자인컬럼니스트(jina@jinapark.net)
All photos courtesy: Museum für Gestaltung Zürich / ZHd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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